신용회복경험담

2025.07.01 14:15

누가 봐도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

  • 최고관리자 오래 전 2025.07.0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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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부: 누가 봐도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

저는 올해 35세, 글로벌 IT 기업에서 마케팅 매니저로 일하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수입, 이해심 많은 아내, 유치원에 다니는 귀여운 딸까지. 누가 봐도 부족할 것 없는 삶이었죠. 퇴근 후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 아이의 웃음소리, 주말에 함께 떠나는 짧은 나들이. ‘행복이란 게 별건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평범함 속에도, 더 좋은 걸 해주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습니다. 특히 아이가 어릴 때부터 영어에 흥미를 보이자, 아내와 저는 ‘조기유학’이라는 꿈을 갖게 되었죠. 이 결정이 나중에 우리 가정에 얼마나 큰 짐이 될지 그땐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2. 전개: 아이에게 주고 싶었던 ‘기회’, 그러나

해외 유학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학비 외에도 생활비, 기숙사비, 항공권, 현지 케어 서비스 등 1년에 천만 원 단위로 돈이 빠져나갔고, 저는 그 비용을 메우기 위해 카드론과 학자금 명목의 대출을 이용했습니다.

처음엔 회사에서 받은 성과급이나 연말 보너스로 어느 정도 감당이 가능했지만, 코로나 이후 회사 실적이 떨어지며 인센티브가 사라지고, 그때부터 이자 납부조차 벅차졌습니다. 특히 두 군데 은행과 두 곳의 카드사에서 총 8천만 원의 채무가 쌓이면서, 매달 고정지출보다 이자와 원금 상환이 더 많은 상황이 반복됐습니다.

아내와의 말다툼도 잦아졌고, 집안 분위기 역시 예전 같지 않았죠.



 


3. 위기: ‘이대로 가다간 무너진다’는 절박함

결정적인 계기는, 카드 연체로 인한 압류 예고 문자였습니다. 회사에 이 사실이 알려질까 봐 두려워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웠고, 급기야 병원에서 공황장애 진단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현실을 직시했습니다. 더 이상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걸. 아내에게 모든 상황을 솔직히 털어놨고, 처음엔 충격이 컸지만, 곧 함께 해결책을 찾아보자며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그 후 지인의 소개로 개인회생 제도를 알게 되었고, 약 한 달간 고민 끝에 상담을 신청하게 됐습니다. 상담실 문을 들어설 때의 그 무거운 마음, 아직도 생생합니다.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자책과 동시에, 어쩌면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4. 해결: 조심스럽게 시작한 새로운 길

서류 준비부터 법원 인가까지 약 4개월이 걸렸습니다. 저의 소득, 부양가족 수, 채무 금액 등을 고려해 월 38만 원씩 3년간 상환하는 변제계획이 인가됐습니다. 처음에는 법원에 출석해야 한다는 사실도 부담스러웠지만, 실제로는 판사님께서 충분히 제 상황을 듣고 이해해 주시더라고요.

진행 과정 중 가장 힘들었던 건, ‘내가 잘못했다’는 자책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감정을 억누르기보다는 차근차근 마주했습니다. 가계부를 쓰고, 사소한 지출을 줄이며, 하나씩 회복해 나가는 시간이 결국 저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줬습니다.

무엇보다 독촉 전화, 연체 통보 문자, 신용등급 하락 등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가장 큽니다.



 


5. 결말: 다시 단단해진 일상, 그리고 미래

현재 저는 개인회생 1년 차, 매달 꼬박꼬박 납부하며 변제 중입니다. 가끔은 아직도 마음이 무겁지만, 예전처럼 불안에 떠는 일은 없습니다.

아이는 지금 국내로 복학해 학교를 다니고 있고, 아내와 저는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마케팅 업무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고, 언젠가는 창업도 해보겠다는 목표도 생겼습니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 중에, 나와 비슷한 상황에 계신 분이 있다면 꼭 전하고 싶습니다.
개인회생은 패배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빠른 때라는 말, 진심으로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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